2011년 8월 5일 반려동물
“잘못된 말의 사전”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한다. 옛날에도 이런 스타일의 글을 몇 개 쓴 적이 있어서 이 참에 기존 글에도 태그를 다 붙여 놓았다.
이전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 따위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을 쓰려는 시도”로 비칠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유는 말을 까려는 게 아니라 그 말이 함의하는 개념을 까려는 것이다. 저 글에서 언급했듯, “낱말에 새로운 가치, 또는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의 사고 방식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도는 까여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낱말이 그런 인위적인 과정 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면 내가 그 낱말을 여기서 다룰 이유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트위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이것도 이미 글을 썼다!) 그래도 가끔씩 보면 이건 정말 따지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 가장 최근 이슈는 역시 조준 사건이 아닌지 싶은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한 마디만 하면 이걸로 정리가 되겠다.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은 자칭 동물 애호가(이 낱말 자체는 다행스럽게도 의미를 정확히 담아 내고 있다)들이 사람이 동물을 사랑하고 보살펴 준다는 의미의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사람과 동물이 동반자가 되자는 의미에서 바꾼 이름이다. 요컨대 인간과 애완동물은 인간이 주가 되는 단방향 관계인 반면, 인간과 반려동물은 인간과 동물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적어도 그렇게 믿는) 양방향 관계인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게 가능이냐 한 소리냐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구조된 고양이를 구조자로부터 분양받은 사람이 그 고양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 하고 잃어버렸는데, 구조자가 분양받은 사람한테 현재 고양이의 상태를 알아 보려 했으나 번번이 답변을 회피하니 공론화시켜서 지금 사건이 이 지경까지 간 것이다. 당연하지만 분양받은 사람은 구조자한테 한 약속을 못 지켰으니 도의적인 책임은 질 필요가 있는데(그게 “피치 못 한 사정”이라면 처음부터 왜 분양받았단 말인가), 고양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실 구조자도 못 된 놈이다. 인간을 겨우 피해서 도망쳐 왔는데 구조한답시고 데려 와서 다시 인간한테 맡기다니! 실제로 고양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당연히 나도 모르지만 지금의 “구조”라는 작업이 정말로 동물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1
요컨대, 구조자와 분양받은 사람 모두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비단 동물 애호가라는 사람들 말고도 모든 사람은 (그게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간에)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 간다만, 그 자기 만족이 다른 누군가를 피곤하게 한다면 그 일을 좋다고 하기는 좀 그렇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지금 싸우는 짓은 어떻게 보면 당사자인 고양이는 쏙 빼 놓은채, 둘이서 어느 쪽의 자기 만족이 더 높은가를 두고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병신같은 일인가? 게다가 이 문제는 고양이를 설령 데려 와도 제대로 된 얘기를 들을 수 없는(고양이가 어떻게 사람 말을 하겠느냐고) 상황이니, 애초에 고양이, 더 나아가 동물을 “반려자” 삼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애완동물은 가능해도 반려동물은 불가능하다.
덤: 반려동물 논란과는 별개로, 나는 애완동물을 법적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까 말했듯이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의 양방향 관계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는 사실은 종이 다르다는 점만 빼면 노예제와 똑같은 상태이다! 인간의 노예제 역사에서도 노예로 사는 것이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는 이유로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꽤 있었으니, 동물이 자기가 인간의 애완동물로 살아가는 걸 만족한다고 해서 애완동물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대안도 있긴 한데, 그 대안이 뭐냐 하면 애완동물이라는 것이 사실은 동물에 대한 노예제라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동물 애호가도 자신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 잘 나신 자기 만족을 지키고 싶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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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수동적인 방법, 즉 야생동물의 활동 영역을 인간의 활동 영역과 명확히 구분하고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더 윤리적이다. 길고양이에게 최소한의 먹이를 제공하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어디에서도 “애완동물” 내지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