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일 다수결은 이제 질렸다
뭇 사람들을 새벽이 넘도록 못 자게 만든 (서울시장 확정이 아침 8시 20분에 났다며? -_-;) 박빙의 개표가 끝나고 나니 결과가 그야말로 개판이다. 한나라당은 생각보다 선전 못 해서 침울하고, 민주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못 얻어서 침울하고, 진보신당은 민주당 발목 잡았다고 욕먹을까봐 침울하고… 그래도 걔네들 나름대로 깨달은 게 있겠지 뭐. 하여튼 오늘 얘기는 이게 아니고,
이번 선거의 박빙 지역 중 하나인 서울시장 결과만 보자. 오세훈이 208.6만표(47.4%)를 얻고 한명숙이 206.0만표(46.8%)를 얻어서 오세훈이 간발의 차이로 이겼다. 그런데 서울시장에 얘네 둘만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나머지 세 명의 표가 합해서 25.2만표, 즉 5.7%씩이나 된다. 이 얘기를 좀 극적으로 바꿔서 말하면,
과반수(52.6%)의 투표자가 현 시장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 투표를 한 것이다!
물론 결과가 보여 주듯 과반수의 투표자가 있다고 해서 현 시장이 바뀌는 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것이 아닌가? 시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안 바뀌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보다 많은데 단순히 바뀌어야 하는 사람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 하여 시장을 바꾸지 못 한 것이다. 합의를 못 이뤘으니 기존의 후보가 선택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다면 조금 더 범위를 좁혀서, 노회찬이 한명숙과 단일화를 했다고 생각해 보자. 당연히 여기에는 복잡한 정치 논리가 작용하지만 (그리고 단일화한 것 때문에 떠나는 표도 분명 있을 터) 일단 되었다고 치면 오세훈은 대략 1~2%p 차이로 털릴 게 분명한데 그럼 단일화를 안 한 얘네들한테 잘못을 다 물어야 하는가?1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단일화를 “조장”하는 현행 선거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듣기로는 진보신당 당원들은 선거때마다 눈물을 머금고-_- 민주당으로 전략 투표를 한다는 얘기도 있던데(진짜인진 모른다) 전략 투표 자체가 올바른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을까?
투표 및 선거 제도에 대한 연구가 안 된 것도 아니다. 사실은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는 투표 제도는 정말 다양하고, 각 투표 제도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도 웬만한 내용은 다 나와 있다. 이를테면 (여기서 특히 말하고 싶은) 한 사람 뽑는 선거의 경우 위키백과에 아예 표로 해당 사항이 정리되어 있다. 안 좋은 소식은 이상적인 투표 제도가 가졌으면 좋을 듯한 많은 성질들이 보통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꽤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덜 중요한 성질들을 제치고 더 필요한 성질들을 만족하는 투표 제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질 중 중요한 것 몇 개만 소개하면,
- 전체 투표자 중 과반수 이상이 특정 후보를 다른 후보들에 대해 항상 선호하면 그 후보가 뽑혀야 한다. (과반수 선호) 콩도르세 조건이라 하여 이 조건을 좀 더 강화한 성질도 있다.
- 투표자를 둘 이상의 서로 무관한 집합으로 나눠서 각각 투표를 진행했을 때 모두 같은 결과가 나오면 전체 투표자를 합쳤을 때의 결과도 동일해야 한다. (일관성)
- 전략 투표가 불가능해야 한다. 이를테면 동일한 후보가 둘 나왔을 때 한 사람 나왔을 때와 (그 두 사람 사이의 상대적인 결과를 제외하고) 전체 결과에 영향이 있으면 안 된다거나 (동일 후보에 대한 독립성), 이 조건을 좀 더 강화해서 동일한 후보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후보가 나타났을 때 그 후보의 결과 빼고 전체 결과에 영향이 있으면 안 된다(무관한 대안에 대한 독립성; IIA) 등등의 조건이 있다.
- 어떤 임의의 투표자도 자기 혼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투표 결과를 조작할 수 없다. (비독재성) 물론 박빙의 승부라면 어떤 투표자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아래 후보들을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
- 투표자들이 원한다면, 투표의 결과로 어느 후보라도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투표 제도 자체가 특정 후보를 못 뽑도록 막지 말아야 한다. (전사성)
써 놓고 보니까 예전에 똑같은 얘기를 여기서 한 것 같은데 대강 넘어 가자. 맨 마지막 비독재성과 전사성이 정말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게 당연해지지 않는 이유는 이들 성질 중 일부 집합을 선택하면 비독재성이나 전사성을 깨뜨리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링크 참고)
결국 제대로 된 투표 제도를 얻기 위해서는 덜 중요해 보이는 조건을 날려서 그럴듯하고 충족 가능한 집합만을 날려야 하는데 물론 쉽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전략 투표를 막는 것이 유권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 생각하여 승인 투표(approval voting), 즉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찍을 수 있는 다수결 제도의 확장을 선호하는 편이긴 한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테니 뭐 여기서 승인 투표가 좋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2 중요한 것은 다수결 투표 제도를 꼭 고수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특히 다수결의 폐해가 잘 드러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면 바꾸는 게 더 이득이라는 점이다. 투표 제도를 바꾸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논의가 별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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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수 진영에 대해서도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만에 하나 진보 진영이 단일화에 성공해서 표를 결집하는 데 성공했으면 한나라당은 자유선진당 후보의 표가 아쉬운 상황에 처해 버릴 것이다. 요점은 보수든 진보든 똑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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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투표의 가장 큰 약점은 과반수 선호를 완벽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점과 선정성 투표에 대한 독립성(“later-no-harm”이라 부른다)을 만족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근데 사실 후자는 콩도르세 조건과 상충되고 전자는 전략 투표 방지로 얼추 상충되지 않나 싶긴 하다. 반면 승인 투표가 다른 투표 제도(특히 IRV 따위)와 가장 차별되는 점은 유권자에게 있어서 다수결 제도와 다른 점이 여러 명 투표가 가능하다는 점 뿐이라 굉장히 간단한 확장이라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제도의 간단함도 상당한 강점이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