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9일
낱말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 왔다. “투쟁”과 같은 낱말들은 근대 한국에서 노동권과 동등한 의미로 취급되었으며, 내가 아는 누군가는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개체로서의 “인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1 “살색”이 부분적으로 인종 차별을 함의하므로 “살구색” 등으로 바꿔야 한다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낱말은 은연중에 우리의 사고 방식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 같긴 하다. 그래서 낱말에 새로운 가치, 또는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의 사고 방식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둘이 반드시 동등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낱말이 사고 방식을 보여 준다는 얘기랑 사고 방식이 낱말에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이는 유명한 사피어-워프 가설이다)는 다른 말인데, 후자는 일반적으로 강한 영향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심지어 “에스키모어(?)의 눈을 가리키는 낱말(?) 갯수가 졸라 많다(?)” 같은 신빙성 없는 근거들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배척받기도(?) 한다. 뭐 행동주의자들(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서는 activist의 의미로 썼다)은 그래도 낱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 한 법. 기존의 낱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으나 그 낱말이 본래 피하려던 낱말의 뉘앙스를 물려 받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는 세상이지 않는가.
미투데이 쪽에서 한동안 시끄러웠던 “gay“라는 낱말은 본래 18세기에만 해도 “즐거운”, “조심스럽지 못한” 등의 의미로 쓰이던 낱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초에 굉장히 자유분방한 생활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었다가,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 남성 동성애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그 쪽으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한다. (queer, homosexuality 등의 낱말이 사용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문서 참조.) 그러나 gay는 그 의미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stupid 쯤 되는 말로도 쓰이고, 이게 차별의 의미로 쓰이는 건지 아니면 본래 의미에서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어서 생긴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gay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그런 의미로 그 단어가 쓰이는 걸 들으면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stupid의 의미로 그 낱말을 쓰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을까? 이건 그냥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 이게 과연 가능한 지를 떠나서, 언어는 바꿀 수 있다 쳐도 생각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2
게다가 이번 상황의 경우 낱말이 단순히 본래 유래에서 한 낱자를 바꿔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내가 이 사건이 왜 이렇게 확대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인터넷에서 “자바가이”가 “자바게이”가 되고 “리듬게이머”가 “리듬게이”가 되는 것은 “아햏햏”이 모멘텀을 얻고 퍼지는 과정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 사람들은 새로운 낱말을 찾아 다니고, 종종 그 과정에서 이미 있는 낱말을 뒤틀다가 엉뚱한 낱말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데다가 의도적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게이”라는 낱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이끌린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 그건 언어의 문제가 아니란 거지.) 그러니 새로 나오는 낱말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다. 이런 걸로 싸워 봐야 정력이 아깝다.
다 써 놓고 보니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politically correct”하다는 게 얼마나 무쓸모한지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