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9일 한글 글꼴과 변종
한글과 한국어 하면 이것 저것 말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글꼴이다.
한글 글꼴(여기서는 typeface의 의미로 씀)은 그 종류가 너무 부족해서 (특히 컴퓨터에서)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글꼴의 수가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글꼴 갯수만 따지면 사실 적은 건 아닌데, 일상적으로 쓸 정도로 잘 정립된 글꼴이 모 운영체제에서 기본으로 깔려 나오는 대여섯 개 정도의 글꼴에 불과하다는 것은 — 게다가 그마저도 서너개는 쓰레기라는 것은 — 정말 한심한 일이다. 어느 정도로 쓰레기냐 하면 윈도 비스타부터 맑은 고딕이 새 기본 글꼴로 추가되었지만 맑은 명조를 넣을 생각을 안 해서 현재 쓸만한 바탕 계열(영문으로 치자면 serif) 글꼴이 없다고 봐도 된다! 물론 맥에는 애플고딕과 애플명조가 있고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계에서 널리 쓰이는 은글꼴에는 그래도 열개 남짓한 글꼴들이 있긴 하지만 절대 다수는 윈도 쓸텐데 무슨 소용인지.
과거에 정부 차원에서 글꼴을 직접 만들어서 발표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1996년1991년에 서울시스템한테 용역을 줘서 만들어진 그 유명한 문화부 글꼴. 물론, KS X 1001 한글 및 한자 빼고는 어떤 다른 보조 글리프(확장 한글이나 영문, 숫자 따위)도 들어 있지 않아서 윈도에서 바로 쓸 수는 없었고 저 멀리 세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릴… 뻔 했으나 이를 눈여겨 본 HLaTeX 쪽 사람들이 온갖 삽을 파고 어쩌구 저쩌구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은글꼴1이니 세상은 돌고 도는 것. 하여튼 이 글꼴들은 일반 사용자들의 눈을 사로 잡는데 실패하고, 대부분의 글꼴 회사들이 그 사이에 좆망하여 기업 및 정부를 상대로 한 맞춤 글꼴 제작 등에 전념하였기에,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야 이 상황이 얼마나 충공깽인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으나 때는 늦었다. 아직도, 아직도 우리가 거의 모든 사용자에게 큰 차이 없이 보일 거라고 가정할 수 있는 글꼴은 윈도가 제공하는 기본 글꼴 뿐이다.
한글 글꼴은 종류만 부족한 게 아니라 변종도 부족하다. 기껏해야 글꼴 굵기 바꾸는 게 고작이고 (그리고 아까 말한 윈도 초창기 기본 글꼴들은 이것도 안 된다) 이탤릭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으며 다른 종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실 글꼴군 별로 하나 씩만 제대로 된 게 갖춰지면 그나마 바꿔 가면서 쓸 수 있을텐데, 변종도 부족하면 글꼴의 기능적인 요소를 활용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아래 예제는 유니코드 지원에 따른 프로그래밍 언어의 분류에서 가져 왔다)
- 멀티바이트 문자열 + 바이트 문자열
- 유니코드로 인코딩되었음은 보장하지 않지만 하여튼 바이트 문자열보다는 넓은 문자 체계를 표현할 수 있는 자료형이 존재하는 경우이다. 언어 명세를 최소화하려는 경우에 종종 나타나며, 유니코드보다 이전에 개발된 언어라 설계 당시 보편적인 다국어 처리 표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에도 많이 보인다.
- 대표적인 언어: C, C++
이 텍스트에서 필요로 하는 글꼴 변종의 수는 몇 개일까? 나는 셋이라고 생각한다. 목록 이름과 그 설명은 당연히 잘 구분되어야 하고 (물론 들여쓰기로 구분이 되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그 구분력이 뛰어나진 않다) 대표적인 언어 목록이 그다지 일반 텍스트와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대표적인 언어”라는 마커 자체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 세 개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후자의 구분이 억지라고 생각하신다면, 만약 내가 글에서 처음 나오는 단어를 별도의 변종으로 표현했다면?2 이 변종이 목록 이름에서 쓰이는 변종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세 개는 필요할 것이고, 가능하다면 두 변종이 서로 수직적(함께 쓰일 수 있다)인 게 좋을테니 넉넉 잡으면 네 개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옛날에 메아리에서 변종의 부족을 스타일로 때우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는데, 이를테면 <em>을 기울이지 않고 글자를 키우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해 봤다. 흥미로운 시도기는 했는데 행간이 너무 들쭉날쭉해져서 디자인을 적절히 맞추지 않으면 어색해 보였고, 결국 지금은 이걸 밑줄로 대체해 버렸다. 한편 한글 맞춤법에는 기울임이 없는 대신 각 문자를 돋보이는 점이나 동그라미를 각 글자 위나 아래에 쓰는 변종이 명시되어 있는데, 밑줄과 비슷한 이유로 각 글자들이 잘 묶여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할 대안이 아닐까 싶다.
영문에는 상당히 다양한 글꼴군 및 변종이 존재하고 그 각각이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serif와 sans-serif의 구분은 물론 일반적이고 script 및 decorative 글꼴군이 비교적 잘 정립되어 있어서 (궁서체가 거의 망한 한글과 비교하시라) serif보다 더 강렬한 효과를 필요로 할 때 쓸 수 있다. 변종만 봐도 일반적인 글꼴 굵기 뿐만 아니라 이탤릭(italic) 및 기울임(oblique)3, 모두 대문자로 표기(small-caps), 밑줄 및 가로줄(striked-out) 같은 변종이 일상적으로 쓰이는데 각 변종에는 잘 정립된 기능이 있어서 (이를테면 small-caps는 고유명사의 표기에 굉장히 많이 쓰인다) 텍스트의 의미를 잘 살려 준다. 글꼴이 항상 많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적재적소에 잘 쓰면 텍스트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데, 한글은 적재적소에 쓸 만한 글꼴 및 변종도 모자란 셈이다. 자신이 디자이너가 아닐지라도 이런 문제는 좀 심각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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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글꼴은 스타일로 치자면 문화부 글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산화를 하기 어려워서 그냥 스타일만 따서 새로 그린 것 같다. 그렇다고 들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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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딴 소리를 하자면… 이런 류의 고유명사 내지 새 단어를 마킹하는 방법은 한글 표기법에서 꼭 표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요성은 넘쳐 나지만 실제로 해 보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 혹시 저번 세미나 발표자료를 보셨다면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특정 슬라이드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문법이나 심볼은 모두 색깔로 처리를 해 뒀다. 일반 한국어 텍스트에서도 그런 걸 표현해야 할 필요성은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볼드 말고 별 대안이 없다. (옛날 책 중에는 이걸 그래픽체 같은 걸로 표현한 경우가 있지만… 컴퓨터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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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변종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기울임은 단순히 글꼴을 기울이는 것이고 이탤릭은 기울이면서 이탤릭 고유의 글꼴 특성(이를테면 “k”를 비교하라)을 추가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컴퓨터가 자동으로 만들어 주는 기울임·이탤릭 글꼴은 품질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