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국산 혐오증​

최근에 반디집 얘기를 듣고 한 번 둘러 보러 갔다가 요즘 빵집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가 보니 그다지 변한 게 없다. 뭐 어차피 나는 윈도에서는 압축 유틸리티로 7-zip을 쓰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긴 했지만, 빵집 변경 사항에서 “외산엔진의 버그로 인해…”라는 말이 갑자기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빵집의 파일 포맷 지원이 자체 구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외산인 게 무슨 상관인가? 갖다 쓰는 엔진이면 갖다 쓰는 거지 설마 국산엔진으로 하면 잘 된다는 건 아닐테고.

난 “국산”이라는 말은 실체가 거의 없는 말이라고 본다. 특히 3차 산업(요즘은 태반이 3차 산업이지만 아무튼)에 대한 “국산”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다. 1, 2차 산업이라면 그나마 생산지라거나 하는 걸 따져서 국산이니 수입이니 뭐니 얘기할 수는 있지만, 이 또한 품질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1. 3차 산업의 경우 그 생산물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 경계를 비교적 쉽게 넘나들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생산지라는 개념 자체가 흐려지는 것이 흔한 일이다. 설령 국산이라고 해도 품질을 보장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국산인지 아닌지 따질 수조차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가 전산학도니까 소프트웨어를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예를 들어서 내가 기존의 압축 유틸리티가 구려서 못 쓰겠다 하고 새 압축 유틸리티를 만들었다고 치자. 이 유틸리티는 국산인가? (물론 나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다.) 만약 내가 libxad 같은 압축 해제 라이브러리를 갖다 썼다면, 내가 만든 것은 인터페이스 뿐일텐데 그럼 그걸 국산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약 여기에 아니오라고 답했다면, 알집은 당연히 국산이 아니다(자체 포맷을 제외하면 Xceed Zip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상당 기간동안 ZipTVXceed Zip 등의 외부 라이브러리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여기에 예라고 답했다면, 아마도 alz 포맷의 압축 해제를 지원2하는 The Unarchiver나, 한국인 참가자가 있는 각종 오픈 소스 프로젝트들도 국산으로 쳐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압축 포맷은 구현했으나 압축 알고리즘은 구현하지 않고 zlibbzip2를 갖다 썼다면 어쩔텐가? 참고로 나는 deflate/zlib 알고리즘은 알고 있지만 bzip2 알고리즘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정확히 알지 못하니, zlib은 알아도 귀찮아서 갔다 썼다고 변명할 수 있어도 bzip2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국산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두부 모 자르듯이 깔끔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국산이라고 해서 딱히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를테면 오픈 소스 프로젝트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국산이 아닌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국산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표방(?)했던 XE텍스트큐브가 과연 한국 바깥에서 얼마나 쓰일까? 똑같이 한국인이 만들었는데 외국인 참가자가 꾸준히 있는 무비스트랑 뭐가 다르길래 이런 차이가 생겼냐고? 간단하다. 피드백을 못 받으니까. 셋 다 지역화는 비교적 충실히 되어 있는 편이지만, XE와 텍스트큐브는 다국어 사이트가 없다. 텍스트큐브는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 한국 바깥에서 종종 쓰이는 게 목격되긴 하지만, XE는 난 아예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소프트웨어의 지역화는 단순히 번역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해당 문화에 알맞는 기능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XE를 예로 들면, 본래 기반이 제로보드인지라 전통적인 한국형 게시판3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스레드형 게시판4이 훨씬 많이 쓰인다. 솔직히 XE가 스레드형 게시판을 몰라서 못 만든 것은 아닐 것이요, 그냥 필요성을 못 느꼈거나 피드백을 많이 못 받은 것일텐데 어느 쪽이든 국산임이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작용한 예일 것이다. 텍스트큐브는 문화적 차이에는 약간 덜 민감하지만 여전히 좀 어중간한 감이 있다. 반면 무비스트는 처음부터 구글 코드에서 호스팅을 받았기 때문에,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하지만) 개발이 꾸준히 진행됨과 함께 피드백도 꾸준히 들어 오면서 국내의 실정에 알맞은(자막 붙은 영상이 많은…) 소프트웨어에서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국제적인 소프트웨어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5. 무비스트가 네이버 개발자 센터에서 호스팅받았다면 (저 쪽 개발자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절대로 피드백이 안 왔으리라 장담한다.

요컨대, 국산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도 보통 쉽지 않고, 그걸 구분해서 좋을 점도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이다. 국산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위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는 집어 치워라. 미래를 위해서라면, 국산 기술이냐 아니냐 같은 일차원적인 발상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기술을 알아 보고 필요하다면 만들 수도 있는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 프로그램은 그런 의미에서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 이걸 인식하질 못 하니 다들 헛발질을 하는 것이다.


  1. 물론 국산일 경우 국가 내에서 품질을 관리하고 그 과정을 국민들이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으니 그 자체로 장점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렇게 할 때의 얘기다. 내가 기억하는 바 정부는 국산 소비 장려는 했어도 국산이 좋은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별로 하지 못 했다. 

  2. 단순히 지원만 하는 거라면 국산 포맷을 외산 엔진이 지원한다는 주장으로 얼렁 뚱땅 넘어 갈 수 있겠다. 하지만 The Unarchiver의 alz 포맷 지원은 궁극적으로는 unalz에서 출발한 것이다(The Unarchiver 저자는 코드를 새로 짜고 그 전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compression method 3을 구현하는 수고를 들이기는 했다). unalz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3. 상대적으로 글 자체를 중시하고 글에 붙는 의견에 대해서는 주의를 덜 기울인다(스레드형 게시판의 영향으로 댓글 기능이 강화되기 전만 해도 댓글은 한 줄에 불과했다). 글은 일반적으로 글 쓴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되므로 글의 노출도는 중요도와 관계 없이 타이밍에 매우 민감하다. 

  4. 글과 거기에 연관된 글들의 모임인 스레드를 기본 단위로 하며, 보통 스레드는 스레드에 마지막으로 글이 올라온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된다. 따라서 글의 노출도는 보통 중요도에 비례하며, 노출이 높을 수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스레드임을 알 수 있다. 

  5. 물론 자막 품질이 기존 동영상 재생기보다 나았다는 것도 한 몫 했겠다(사실은 이게 killer feature). 관련 블로그 글 참고. 


노트들

  1. arachneng posted this
텀블러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