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민족이란 이름 아래​

나는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민족주의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족, 나아가서 그와 비슷한 또는 동등한 개념으로 종종 인식되는 국가의 존립을 위해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를 용인해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꽤 많은 국가들은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다른 민족을 가지고 별의별 짓을 하게 마련이라, 이걸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이 당하는 민족을 일시적이나마 결집시키는 것 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인 방법은 한국의 독립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 굉장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종종 이 갈등이 민족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인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근데 웃긴 건, 그렇게 해서 국가가 형성된 다음에 그 국가가 — 종종 역으로 —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삽질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최근 몇 년 간의 짐바브웨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대강 얘기하자면 독립 운동으로 권력을 잡은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농토를 강제로 재분배하는 정책을 펼치다가 경제를 말아 먹은 덕택에 발생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한국이 독립 후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친일 청산”이라는 이름의 삽질도 있는데, 단지 일제 시대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역사적인 건물들을 제거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주요 인물들을 부관참시를 하는 등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그냥 민족주의만 가지고 쇼를 하는 것이다. 친일 행적을 한 건 역사적인 사실이므로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지만 부끄러운 역사는 역사가 아닌가? 역사에 손을 대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그 역사의 진실성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결국 누구나 손을 대긴 하지만, 적어도 적게 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 않은가?) 조선총독부가 지은 건물이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이 지은 곡이든, 더 이상 일제 시대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일이지 왜 그걸 깨 부수려고 하는 건지, 나는 이걸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아까 전에 말했듯 지나친 민족주의는 종종 다른 민족(이라는 게 있다면…)을 억압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히틀러는 독재로 성장한 게 아니라 파시즘에 매도된 독일 민중들의 힘을 업어 성장한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 사회에 훨씬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단일 민족이라는 미신은 깨진지 오래고, 한국이 민족주의가 절실히 필요할 정도로 국가적 위기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이제는 죽은 민족주의의 망령을 (좌우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이 악용하는 게 사회적으로는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국가는 현실적으로 버릴 수 없어도, 민족은 이제 버릴 때가 된 것 같다.


노트들

  1. arachneng posted this
텀블러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