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현명한 기술 수용​

최근 몇 년동안 내가 스마트폰이 없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뭐 결국 계기가 생겨서 사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얼리 어답터(선각 수용자)로 분류되기에는 너무 반응이 늦다. 기껏해야 전기 수용자1거나 종종 후기 수용자가 될 정도? 세 개의 운영체제를 쓸 정도로 기술적 범위가 넓은 사람 치고는 업데이트도 자주 안 한다: 나는 윈도 XP 이후의 운영체제를 데스크탑으로 쓴 적이 아직 없고 (다만 이건 아직 윈도를 깔만한 머신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머신이 생기면 아마 7을 깔 것이다) 맥도 10.5 다음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길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아마 지금 상황을 볼 때 새로 산 넥서스 원도 지금은 최신 버전이긴 하지만 프로요 다음 버전 나오면 한참 뒤에 업데이트할 것이 거의 명확해 보인다.

내가 기술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기술은 순식간에 다른 기술로 대체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리 어답터들을 보면 새 기술이 나올 때마다 와아- 하고 몰려 나가는데 이게 참 웃긴 것이다. (물론 애플 같은 회사가 이런 얼리 어답터들을 굉장히 잘 써먹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싫다.) 애플 얘기 했으니까 이걸로 예를 들자면, 아이폰 3GS 나오면 다음에는 아이폰 4 나올 거고 그 다음에는 아이폰 5? V? X? 뭐 어쨌든 뭔가가 계속 나올 것이고… 물론 새 버전은 이전 버전보다 뭔가 더 좋은 것이 있겠지만 (해상도가 좋아지긴 했다더라) 솔직히 말해서 난 아이폰 새 모델 나오는 것에 연연해야 할 정도로 변화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애플 제품 쓴지 4년째 되어 가고 거기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크기의 변화가 쌓여서 나에게 직접 와닿지 않는 한은 변화에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기술 수용 모델은 배치(batch) 모델이다. 사람들이 충분히 경험해서 그 장단점이 뚜렷하게 보이고, 그 중에서 장점이 충분히 커 보일 때 비로소 기술을 수용한다. 일반 사람들보다는 여전히 좀 빠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중간 쯤에 위치하게 되는 셈. 내가 배치 처리를 쓰는 대부분의 일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실시간으로 할 필요는 없고 언젠가, 어느 적절한 주기로는 해야 할 일에 적용되는데, 이를테면 쓰레기 버리기2라거나 메일 확인(요즘은 주기가 좀 짧아지긴 했는데…)이라거나 이런 일이 여기에 포함된다. 기술 수용도 굳이 이렇게 안 할 이유가 없다.

내가 기술 수용을 배치로 하는 데는 사용자화(customization)도 원인이 크다. 물론 친숙한 인터페이스가 다 직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한 인터페이스를 딱 정해 놓고 사용자가 그걸 뜯어 고치게 된다면,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이 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터페이스의 직관성은 초기의 학습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 그 후의 지속적인 사용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직관성이 높지만 그 다음에 효율이 높아지는 속도가 떨어지는 인터페이스도 꽤 존재한다(맥을 생각해 보라). 가장 좋은 인터페이스는 무울론 직관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사용 효율을 높여 주는 인터페이스고, 이를테면 구글 검색이 실제로 그런 경향이 있는데3 이런 건 정말 엄청난 테스트와 삽질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라 보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처음 직관성과 그 다음의 효율을 적절히 분배해서 현재 사용하는 솔루션과 비교하여 전환 여부를 결정하는데…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온갖 것들을 사용자화하기 때문에4 한 번 최적화된 솔루션을 고치는 것 자체가 쉽진 않다. 새 기술이 나왔다고 그 기술로 즉각 전환한다면, 나는 나에게 최적화된 뭔가를 시도할 엄두도 느끼지 못 할 것이다. 내가 다른 것들을 거의 다 제쳐두고 넥서스 원을 산 이유도 사용자화가 90%였다. 절대 학교 내 KT 매장에서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뭐, 기술에 좀 열광하는 게 (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얼리 어답터가 아예 없다면 그 기술의 미래는 없으니까. 하지만 무엇이 당신에게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새 기술로 바꿨을 때 얻는 이득이 잃는 것보다 충분히 큰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왜 새 기술로 바꾸는 것이 좋은 생각이 아닌가”를 앞에서 몇 문단으로 써 봤다. 새 기술에 대해서 이 정도의 논거도 제시할 수 없다면 (기술을 말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걸로 뭐가 훨씬 더 좋아지는지를 설명하란 말이다) 기술이 당신을 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기술이 당신을 노예로 만들 것이다.


  1. 혁신의 전파 모델에 따른 것. 얼리 어답터 다음으로 기술을 수용하게 되는 첫 50%의 사람들. 

  2. 음식물 쓰레기처럼 실시간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아닌 이상 난 쓰레기를 굳이 실시간으로 쓰레기통에 갖다 넣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아니, 대놓고 말하자면 무슨 요일에 무슨 종류의 쓰레기를 갖다 버리자 하는 것 자체가 배치 처리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이걸 보고 뭐라 뭐라 그런다. 윽. 

  3. 무슨 검색어를 입력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검색 속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구글 인스턴트를 내놓는 걸 생각해 보라. 

  4. 윈도에서는 많이 쓰는 프로그램들은 한 글자 또는 두 글자 커맨드로 실행되도록 고쳤고, 맥에서는 기본 단축키가 없는 것들 중 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추가했으며 (그래서 다른 맥에 가면 버벅인다), 리눅스도 기본적인 인터페이스는 거의 대부분 손을 봤다. 또한 크롬도 자주 가는 수십여개의 사이트 및 서비스들은 모두 한 두 글자 키워드가 매핑되어 있고, Vim이야 수백줄짜리 .vimrc 쓰고 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넥원 브라우저 시작 페이지를 로컬 파일 시스템의 커스텀 페이지로 교체했다. (그 큰 스크린을 구글 검색에만 쓰는 건 아깝지!) 


텀블러를 씁니다.